설교 제목: 설교 제2번
하나님의 시험을 받은 아브라함
일시: 서기 391년
본문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을 위하여 근심치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
아브라함의 믿음과 경건
1. 방금 들은 낭독을 통해 우리 조상 아브라함의 저 유명한 경건이 우리 마음에 되살아났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어서, 아무리 경솔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결코 잊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 이야기는 읽힐 때마다 매번 마치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청중의 마음을 뒤흔듭니다. 그의 믿음은 어떠했습니까! 그는 하나님께뿐만 아니라 그의 외아들에게도 얼마나 헌신적이었습니까! 아브라함은 아들을 창조하신 분이 그에게 무엇을 하라고 하시든, 그 아들에게 아무런 해가 미치지 않을 것임을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연의 작용에 따라 아들의 아버지가 될 수 있었으나, 전능하신 능력의 작용에 따른 창조주나 제작자는 될 수 없었습니다. 사실 사도가 말했듯이, 이삭은 자연을 따라 아브라함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약속을 통하여 났습니다(갈 4:23). 그가 자연의 순리대로 행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전혀 가망이 없어 보일 때 그를 낳았다는 뜻입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약속으로 함께하지 않으셨다면, 이미 노인이 된 그가 연로한 배우자의 태에서 후손을 바랄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아들이 태어날 것을 믿었고, 이제 아들이 죽으려 하는 순간에도 그를 위해 슬퍼하지 않습니다. 그의 마음이 아들의 탄생이라는 보상을 얻을 믿음을 위해 선택되었듯이, 그의 손은 아들을 죽일 제사의 도구가 되기 위해 선택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약속받았을 때 믿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아들을 바치라는 요구를 받았을 때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믿음 안에서의 그의 경건함은 순종 안에서의 그의 헌신과 조금도 어긋나지 않았습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셨다. 아들을 약속하셨을 때 나는 하나님이 내게 후손을 주실 것을 믿었다. 그런데 어떤 후손인가?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 (창 21:12)고 하실 정도였다. 그리고 내 아들이 나보다 먼저 죽는 방식으로 내 씨가 불리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시려고,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창 22:18)라고 하셨다. 그런데 그분이 직접 내게 말씀하시고 아들을 약속하셨으면서, 이제는 직접 그를 죽이라고 요구하시는구나!"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서로 모순되고 대립한다는 문제, 즉 하나님이 먼저 아들이 태어날 것을 약속하시고 나중에 "나를 위해 네 아들을 죽이라"고 말씀하신다는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그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흔들리지 않고 절대적으로 실패함 없는 동일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존재하지 않던 자를 연로한 부모에게서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께서 죽음으로부터 그를 다시 살리실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행하신 일, 즉 모든 소망이 사라진 뒤에 아들을 주신 일은 (인간적인 한계를 고려할 때) 불가능한 것이었기에 훨씬 더 위대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온 마음을 믿음에 쏟았습니다. 그는 창조주께 불가능한 일이란 없다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여 아들을 낳았듯이, 나중에 이 명령을 받았을 때도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그는 이미 아들을 낳음으로써 하나님이 참되심을 증명했습니다. 그는 아들을 낳는 점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했고, 그를 죽이는 점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그는 내내 신실했으며, 결코 잔인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실제로 아들을 제사 드리는 곳으로 데리고 갔으며, 오른손에 칼을 들기까지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누가 치려 하고 누구를 치려 하는지 보십시오. 그리고 누가 명령을 내리고 계신지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순종함에 있어 경건하고 충실했습니다. 그렇다면 명령을 내리신 하나님은 어떠합니까? 결국 신성모독적이라고까지는 말하지 않겠으나, 연약한 마음들은 그 명령을 내리신 하나님을 비난하려는 유혹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순종한 자가 칭찬받는다면, 명령을 내린 분이 어떻게 비난받을 수 있겠습니까? 아브라함이 순종함으로써 잘 행했다면, 명령을 내리신 하나님은 훨씬 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잘 행하신 것입니다.
계집 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을 위하여 근심치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마니교도들
2. 아마도 우리는 여기서 어떤 신비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 이유 없이 이 명령을 내리신 것이 아닙니다. 또한 이 말씀을 읽을 때 이해력이 다소 부족한 이들을 당혹스럽게 할 수 있는 세속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서도 안 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창 22:1)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사물에 대해 무지하시며 사람의 마음을 알지 못하셔서 시험을 해봐야만 사람에 대해 알게 되시는 분입니까? 물론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형제들아, 먼저 거룩한 성경인 옛 율법을 반대하는 자들에 대해 말하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을 이해하지 못할 때, 이해하려고 노력하기보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비난하려 듭니다. 그들은 겸손하게 구하는 자들이 아니라 자만심에 빠진 억지 주장자들입니다. 이들은 복음은 받아들이고 싶어 하면서도 옛 율법은 경멸하며, 한쪽 발로만 똑바로 걸으면서 하나님의 길을 따를 수 있다고 상상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배운 서기관이 되어 자기 보물곳간에서 새것과 옛것을 내오는 자들이 아닙니다.
이곳에 정체를 숨기고 그런 자들이 있을 수도 있고, 혹은 설령 없더라도 여러분이 그런 자들에게 대답할 말을 가질 수 있도록 이 문제를 간단히 풀어야겠습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들은 복음은 받아들이면서 율법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에게 관대하고 자비롭게 복음을 주시는 분이, 자신을 두려운 율법의 수여자로서 나타내신 분과 동일하다고 말한다." 그분은 율법으로 두렵게 하셨고, 회개한 자들을 복음으로 치유하셨습니다. 그들을 회개시키기 위해 먼저 율법으로 두렵게 하신 것입니다. 그분은 황제처럼 율법을 주셨으나, 율법에 반하는 많은 죄가 저질러졌습니다. 이제 황제로서 주신 그 율법은 오직 죄인들을 벌할 수만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죄에서 해방하기 위해 남은 일은, 미리 율법을 공포하셨던 그분 자신이 친히 오셔서 그들을 면제해 주시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비뚤어진 마음은 무엇이라 말하며, 복음은 받아들이면서 율법을 경멸하는 비논리적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왜 율법을 경멸합니까? 그는 "거기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을 시험하는 하나님을 내가 예배해야 합니까?" 복음서에 계신 그리스도를 예배하십시오. 그분이 바로 여러분을 율법의 이해로 다시 부르고 계신 분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께로 넘어오지 않았기에 자신들의 환상 속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들은 복음서에서 선포되는 그대로의 그리스도를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만들어낸 그리스도를 예배합니다. 이처럼 그들은 타고난 어리석음의 너울 위에 불순한 추측이라는 두 번째 너울을 덧씌웁니다. 이 이중의 너울을 뚫고 복음에서 빛나는 것을 어찌 볼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이 사람을 시험하는 것을 싫어하지만, 그리스도가 사람을 시험하는 것은 싫어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가 사람을 시험하는 것을 좋게 여긴다면, 하나님이 사람을 시험하는 것도 좋게 여겨야 합니다. 복음서가 말합니다. 예수께서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복음 전도자는 이어서 말합니다.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요 6:5-6) 이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는 하나님께로 여러분의 마음을 돌려보십시오. 하나님 역시 아브라함을 시험하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분 또한 친히 어떻게 하실지 알고 계셨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도 시험하시는 분으로 드러나셨고 하나님도 시험하시는 분으로 드러나셨으니, 시험하시는 분이라고 비난하던 이단들은 꾸짖음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이단들은 하나님이 시험하시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시험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길을 열어주기 위해 시험하시지만, 이단들은 하나님을 자신들로부터 차단하기 위해 시험합니다.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알게 하려고 시험하심
3.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시험은 그분이 이전에는 몰랐던 것을 알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시험이라는 일종의 심문을 통해 사람 안에 숨겨진 것을 드러내기 위함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은 창조주께서 아시는 것만큼 자신을 잘 알지 못하며, 환자가 의사만큼 자신을 잘 알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은 아파하며 고통을 겪지만 의사는 고통을 겪지 않습니다. 환자는 고통을 겪지 않는 의사로부터 자신이 무엇 때문에 아픈지를 듣기 위해 기다립니다. 그래서 시편에서 한 사람이 울부짖습니다.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시 19:12)
사람 안에는 그 사람 자신에게도 숨겨진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들은 시험과 시련과 유혹을 통하지 않고서는 밖으로 나오지도, 열리지도, 발견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시험을 멈추신다는 것은 스승이 가르치기를 멈추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가르치기 위해 시련을 주시거나 시험하시지만, 마귀는 미혹하기 위해 시험하거나 유혹합니다. 그러나 유혹받는 자가 기회를 주지 않는 한, 마귀의 유혹은 실체 없는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물리쳐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엡 4:27)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정욕과 갈망으로 마귀에게 기회를 줍니다. 사람들이 싸우고 있는 마귀를 직접 볼 수는 없지만, 거기에는 아주 쉬운 해결책이 있습니다. 내면에서 자신을 정복하십시오. 그러면 외부에서 그(마귀)를 이길 것입니다. 내가 왜 이 말을 합니까? 시련과 유혹과 시험을 통해 자신을 배우지 않고서는 여러분 자신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에 대해 배우게 되었다면 자신에 대해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적어도 자신에 대해 잘 몰랐을 때 소홀했다면, 이제 자신을 알게 된 후에는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하나님은 값없이 사랑받으셔야 함!
4. 형제들아, 우리는 무엇이라 말해야 하겠습니까? 비록 아브라함은 자신을 알았을지라도 우리는 아브라함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나 혹은 적어도 우리에게 보여져야만 했습니다. 자신에게는 무엇을 감사해야 할지 알게 하기 위함이요, 우리에게는 주님께 무엇을 구해야 할지 혹은 저 사람에게서 무엇을 본받아야 할지 알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칩니까?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들을 하나님보다 더 가치 있게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직 외아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받은 아브라함의 이 신비 혹은 성례(sacrament) 속에 감추어진 내면의 비밀, 즉 상징된 실재에 도달하기 전의 문자적 의미만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베푸시는 가장 가치 있는 것조차 베푸시는 분보다 더 우선시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그분이 그것을 여러분에게서 가져가려 하실 때에도 하나님을 낮게 평가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아무런 보상 없이, 거저, 그리고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고 사랑받으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여러분이 하나님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보상 중에 하나님 자신보다 더 사랑스러운 보상이 어디 있겠습니까?
5. 이처럼 아브라함은 헌신적인 순종을 온전히 수행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네가 ...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창 22:12)고 말씀하시는 것을 듣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자기 자신에게 알려지게 하셨다는 뜻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마치 선지자가 말할 때와 같습니다. 나는 지금 그리스도인들, 혹은 하나님의 학교에서 진보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초보적인 것도 새로운 것도 아니며, 여러분에게도 나에게만큼이나 친숙하고 명백해야 합니다. 선지자가 말할 때 우리는 무엇이라 말합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라고 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이 옳습니다. 우리는 또한 "선지자가 말했다"라고도 합니다. 이 두 가지를 다 말하는 것이 지극히 옳으며, 우리는 권위 있는 성경에서 두 가지 모두를 발견합니다.
사도들 역시 선지자들을 이런 방식으로 이해했기에,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라고도 하고 다른 곳에서는 "이사야가 말했다"라고도 했습니다. 성경에서 두 가지를 모두 발견하기에 각각은 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내가 방금 제시한 이 문제를 해결한다면, 그 사람은 내가 조금 전에 제시한 문제도 스스로 해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사람이 하나님의 선물로 무엇인가를 말할 때, 그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마 10:20)는 말씀과 같습니다. 또한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갈 5:2),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것" (고후 13:3)이라고도 합니다. 형제들아, 처음에 복잡해 보였던 그 지점에 이 규칙을 적용해 보십시오. 그러면 아주 단순해질 것입니다.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이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증거를 너희가 구함이니 저가 너희를 향하여 약하지 않고 도리어 너희 안에서 강하시니라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성경에 감추어진 신비
6. 그러므로 우리 모두 그분을 주목합시다. 그분이 우리의 굶주린 영혼을 먹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분은 부유하셨으나 우리를 위해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것은 그분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부요하게 되기 위함이었습니다(고후 8:9). 우리가 방금 그분께 "이것들은 다 주께서 때를 따라 먹을 것을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시 104:27)라고 노래한 것이 얼마나 적절합니까? 만약 "이것들(만물)"이라면 모든 사람들입니다. 모든 사람들이라면 우리 또한 포함됩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 설교에서 여러분에게 어떤 좋은 것을 준다면, 그것을 주는 것은 내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바라보고 있는 그분입니다.
지금은 그분이 주실 시간입니다. 그러나 그분이 주시려면 우리는 그분이 말씀하신 바를 행해야 합니다. 즉 우리는 그분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으로 그분을 응시합시다. 여러분 몸의 눈과 귀가 나를 향하고 있듯이, 여러분 마음의 눈과 귀도 그분을 향해야 합니다.
이제 위대한 성례 혹은 신비를 듣기 위해 여러분 마음의 귀를 여십시오. 거룩한 성경의 모든 신비로운 성례들은 물론 위대하고 신성합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우리에게 최상의 경계심을 요구하며 다른 것들보다 더 쓰러진 자들을 일으키고 굶주린 자들을 채우는 것들이 가장 주목할 만하고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 경우에 굶주린 자들은 구역질이 날 정도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혐오감 없는 충만함을 즐기고 넌더리 내지 않으면서 필요를 충족하게 됩니다.
약속으로 받은 선물이신 외아들을 그 선물을 주신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을 받고 핵심까지 뒤흔들리지 않을 자가 누구겠습니까? 우리가 들은 대로 그 사건들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사실은, 그 사건들이 가진 감추어진 신비롭고 성례적인 의미에 대한 설명을 찾고자 하는 우리의 결심을 그 어느 때보다 더 확고하게 만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들이 다 주께서 때를 따라 식물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함
7. 그러나 형제들아, 무엇보다 먼저 나는 주님의 이름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한 가지를 촉구하고 강조해야겠습니다. 일어난 일들을 말해주는 성경 이야기의 숨겨진 의미에 대한 설명을 들을 때, 여러분은 먼저 들은 대로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실제 사건이라는 기초가 제거되어, 여러분은 허공에 성을 쌓는 격이 될 것입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은 그 시대의 사람이었으며 신실했고 하나님을 믿었으며, 구약과 신약 성경이 모두 말하듯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그는 아내 사라를 통해 아들을 얻었습니다. 비록 두 사람 모두 매우 고령이었고 인간적인 방식으로는 자녀를 가질 소망을 모두 버린 상태였지만 말입니다.
결국 하나님께 무엇을 바라는 것이 불가능하겠습니까? 그분께 어려운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분은 위대한 일을 행하시듯 작은 일도 행하십니다. 그분은 산 자를 창조하시듯 죽은 자도 살리십니다. 화가가 코끼리를 그리는 것과 똑같은 기술로 쥐를 그릴 수 있다면(대상은 다르지만 기술은 하나입니다), 하물며 "그가 말씀하시매 지음을 받았으며 그가 명령하시매 창조되었음이로다" (시 148:5)라고 한 하나님은 어떠하시겠습니까? 말씀으로 만드시는 분에게 무엇을 만드는 것이 어렵겠습니까? 그분은 하늘 위의 천사들을 쉽게 창조하셨고, 동일한 쉬움으로 하늘의 광명체들을, 바다의 물고기들을, 땅 위의 나무와 짐승들을 만드셨습니다. 위대한 것들도 작은 것들과 마찬가지로 쉽게 만드셨습니다. 그분께서 무(無)에서 만물을 만드시는 것은 지극히 쉬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노부부에게 아들을 주신 것이 어찌 놀라운 일이겠습니까?
이처럼 하나님의 소유된 이들이 그 시대에 있었고, 하나님께서는 장차 오실 자신의 아들의 전령으로서 그들을 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그들이 말한 것뿐만 아니라 그들이 행한 것이나 그들에게 일어난 일 속에서도 찾아져야 하고 발견되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에 대해 기록된 모든 것은 실제로 일어난 일이자 동시에 예언입니다. 사도가 어느 곳에서 말한 바와 같습니다. "기록된 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 이것은 비유니." (갈 4:22-24) 이들은 곧 두 언약입니다.
그것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 것은 저가 명하시매 지음을 받았음이로다
기록된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 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계집 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이삭의 제사: 실재와 상징
8. 이제 우리는 경솔함 없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이삭은 실제로 아브라함에게서 태어났으며, 또한 그는 다른 무엇인가를 표상했습니다.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하나님께 순종한 것, 그곳으로 아들을 데리고 간 것, 제삼일에 도착한 것, 짐승과 함께 두 종을 뒤로 보낸 것, 하나님이 명령하신 곳으로 직접 나아간 것, 제단 위에 나무를 벌여 놓은 것, 나무 위에 아들을 둔 것 모두가 그러합니다. 아들이 제사 드리는 곳에 도착하기 전, 그는 자신이 눕게 될 나무를 짊어지고 갑니다.
그 후, 그가 죽임을 당하기 직전의 순간에 그를 아끼라는 목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그러나 그 장면은 제사 없이, 그리고 피 흘림 없이 끝나지 않습니다. 수풀에 뿔이 걸린 숫양 한 마리가 보입니다. 그것이 죽임을 당하고 제사가 드려집니다. 제사가 드려진 뒤 아브라함은 이런 말씀을 듣습니다.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창 22:17-18)
이 일이 언제 일어났는지, 그리고 그 일이 일어났다는 기억이 언제 이루어졌는지 주목하십시오. 저 다른 '양'이 "그들이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시 22:16)라고 말할 때입니다. 시편의 그 제사가 드려졌을 때, 같은 시편은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모든 나라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예배하리니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모든 나라의 주재심이로다." (시 22:27-28) "그들이 기억하리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방금 일어난 것을 본 과거의 어떤 사건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열방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경배하리니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열방의 주재심이로다
칭의에 있어서의 믿음과 행함
9. 그렇다면 아브라함에게 주신 말씀, 곧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라는 말씀이 어떻게 성취되었는지 봅시다. 그것은 언제부터 성취되었으며, 그 성취에 앞서 어떤 제사가 있었습니까? 그 말씀을 직접 듣지는 못했으나, 이제 그것을 읽을 때 아브라함이 들었을 때 믿었던 바를 믿는 복된 민족들이여!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그에게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약 2:23).
그가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은 오직 믿음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그가 아들을 제사 드리기 위해 데려간 것, 주저 없이 오른손에 무기를 든 것, 그 목소리가 그를 제지하지 않았더라면 그 즉시 치명적인 일격을 가했을 것이라는 이 모든 것은 분명 위대한 믿음의 행위이자 동시에 위대한 '행함'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고 말씀하실 때 그 행함을 찬양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사도 바울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롬 3:28)고 말합니까? 또한 다른 곳에서 그는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갈 5:6)이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믿음이 사랑을 통해 역사하며, 어떻게 사람이 율법의 행위 없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습니까? 형제들아, 어떻게 그런지 주의 깊게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믿음을 가지고 병상에서 믿음의 성례를 받고 죽었습니다. 그는 행함을 보일 시간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무엇이라 말해야 합니까? 그가 의롭다 함을 받지 못했다고 해야 합니까? 물론 우리는 그가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말합니다(롬 4:5). 그러므로 이 사람은 어떤 행함도 없이 의롭다 함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는 사도의 판단이 확증됩니다.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던 강도는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렀습니다(롬 10:10).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은, 비록 외부적으로 역사할 기회가 없을지라도 마음속에는 여전히 뜨겁게 간직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율법 안에는 사랑이 아니라 두려움 때문에 행했던 율법의 행위를 자랑하며, 자신들이 의롭다고 생각하고 율법의 행위를 하지 않은 이방 민족들보다 우월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이방 민족들에게 믿음을 전파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주님께 나아오는 자들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이 이미 믿은 후에 행하기 시작한 것이지, 선한 행실을 했기 때문에 믿음의 선물을 받을 자격을 얻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사도는 사람이 율법의 행위 없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다고 확신하며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오히려 두려움 때문에 행했던 자들은 의롭지 않았음을 암시합니다. 믿음은 비록 외부적으로 행위로 나타나지 않을 때라도 마음속에서 사랑으로써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이니라
일을 아니할찌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원문 or 출처
Saint Augustine, Sermons 1–19 on the Old Testament, ed. John E. Rotelle, trans. Edmund Hill, vol. I, The Works of Saint Augustine: A Translation for the 21st Century (Hyde Park, NY: New City Press, 1992), 9–17쪽.